엄마를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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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창작과비평사)


가끔 혼자 아침식사를 하면서 책을 읽는데, 그럴 때 참 좋지 않은 선택 중 하나가 바로 신경숙의 소설이다. 울컥하여 목이 콱 막히는데도 먹던 음식을 남김없이 목구멍으로 집어 넣는 모습이 참 가관이다. 밀리언셀러가 된 이 책은 서울역에서 사라진 어머니와 그로 인해 가족들이 깨닫게 되는 '어머니'의 존재감과 가족 각자가 느끼는 책망에 관한 것이다. 자칫 '명절특집드라마'가 될 수 있는 가족의 사연을 너무나 세련되게 써 내려간 작가의 솜씨가 감탄스럽다.

책 속 구절 : 
- 미안한디...... 그래도 남들이 보믄 뭐라고 하겄소.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이 한 사람은 저만치 앞서서 가고 한 사람은 저 뒤에서 오믄 저이들은 옆에서 같이 걸어가고 싶지도 않을 만큼 서로 싫은가비다 할 것 아니요. 남들한티 그리 보여서 좋을 거 뭐 있다요. 손잡고 가자고는 안할 것잉게 좀 천천히 가잖게요. 그러다가 나 잃어버리믄 어쩔라 그러시우.  
당신은 아내가 마치 이리될 것을 알고나 한 소리처럼 여겨졌다. 스무살에 만나 오십년이 흘러 이 나이가 되는 동안 아내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게 좀 천천히 가잔 말이었다. 평생을 아내로부터 천천히 좀 가자는 말을 들으면서도 어째 그리 천천히 가주지 않았을까. 저 앞에 먼저 가서 기다려주는 일은 있었어도 아내가 원한 것, 서로 애기를 나누며 걷는 것을 당신은 아내와 함께해본 적이 없었다.
당신은 아내를 잃고 나서 자신의 빠른 걸음걸이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터질 듯했다. (p.167~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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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1 22:10 2010/03/21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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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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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천명관 지음ㅣ 문학동네)


책을 읽은 시간은 일주일정도이지만, 그동안 너무나 오랜 세월을 살아낸 기분이다.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나 펄 벅의 "대지"처럼 방대하기 짝이 없는 스케일의 소설이고, (신화적 상상력이라 해야할 지 마술적 리얼리즘이라 해야할 지 모르겠지만) 믿을 수 없는 사건을 실제 일어날 수도 있을거라 믿고 빠져들게 하는 소설이고, 한 번에 다 읽기 버거운 분량이라 밥을 먹거나, 누군가를 만나거나, 출근을 해야 하거나, 밤이 되어 잠을 자야 할 때 책을 놓아야하는 아쉬움이 큰, 그런 소설이다.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2004년)이며 이때의 심사위원인 소설가 은희경의 평처럼 "누구든 이 작가의 입심에 빨려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고, 문학평론가 신수정의 말처럼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그 유구하고 장려한 시간에 압도당"하게 된다.  
실제로 그렇게 파란만장한 삶이 있을까싶은 인생을 살다 간 금복, 평생 그 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생선장수, 범상치 않은 기골의 걱정, 칼잡이, 文, '붉은 벽돌의 여왕' 춘희, 쌍둥이 자매, 국밥집을 하던 박색 노파, 벌치기 애꾸, 약장수, 뛰어난 미모의 수련, '어릴때 공장 마당에서 팔씨름을 벌였던 바로 그 소년' 트럭 운전사, 분노의 무당벌레... 이 소설에 나오는 주요 등장인물은 이외에도 계속 이어진다. 이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생존을 위한 노고와 죽음과 복수와 용서와 이해와 사람사이의 정情과 돈과 사랑 비슷한 감정과 수많은 법칙들로 이루어지는 이 소설은 정말이지 놀랍고 멋진 작품이다.

책 속 구절 :
어쨌거나 철도공사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외지에서 일거리를 찾아 뜨내기들이 하나둘, 평대로 모여들었다. 목도꾼을 위시한 철도 인부들과 현장소장을 위시한 건설회사 직원들이 먼저 들어오고 그들을 상대로 한 술집과 음식점이 들어서자 뒤따라 몸 파는 여자들이 들어오고, 또 그네들을 상대로 한 도붓장수와 등짐장수, 방물장수가 들어오고, 마침내 일 년 뒤 기차가 마을 앞을 지나다니게 되자 일을 하다 다친 인부들을 치료해줄 의원과 영혼을 치료해줄 목사와 전도사, 신부와 중이 기차를 타고 한꺼번에 들어오고, 예배당과 성당과 절이 한꺼번에 세워지고, 다시 예배당과 성당과 절을 지을 인부들이 한꺼번에 들어오고, 다시 그들을 상대로 몸을 팔 여자들이 한꺼번에 들어오고, 이런 식으로 일거리를 찾아, 볼거리를 찾아, 기회를 찾아, 건수를 찾아, 신도를 찾아, 짝을 찾아 먼 도시 또는 인근마을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훗날 평대의 향토사학자들은 이때의 갑작스런 인구팽창을 가리켜 '평대의 일차 빅뱅'이라 일컬었다. (p.148)

잠시 후, 금복의 몸 구석구석을 찍은 엑스레이 사진이 나오자 그녀는 마치 진기한 보물지도를 들여다보듯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거기에 탐스러운 머리카락과 풍만한 엉덩이, 뜨거운 눈빛과 발그레한 뺨은 모두 사라지고 죽은 나무 삭정이 같은 앙상한 뼈만 하얗게 남아있었다. 금복은 사진을 집으로 가져와 전등불에 비춰보며 흘린 듯 며칠 동안 관찰하다,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러니까 다 껍데기뿐이란 말이군. 육신이란 게 결국은 이렇게 하얗게 뼈만 남는 거야.
그녀가 엑스레이 사진을 통해 발견한 것은 바로 죽음 뒤에 남게 될 자신이 모습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죽어지면 썩어질 몸'이란 말을 자주 되뇌었다. 그리고 곧 내키는 대로 아무 사내하고나 살을 섞는 자유분방한 바람기가 시작되는데, 그것은 어쩌면 평생을 죽음과 벗하며 살아온 그녀가 곧 스러질 육신의 한계와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덧없는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p.216)

文에게 소문을 전해준 사람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전답 수백 마지기를 노름으로 몽땅 날리고 마누라까지 잡힌 끝에 결국 오갈 데 없는 뜨내기 신세가 된 한 나이든 인부였다. 그는 한껏 조심스럽고 완곡하게, 언제나 소문과 함께 장식처럼 따라다니는 변명들을 장황하게 섞어, 예컨대, 자신을 결코 입이 싼 사람이 아니며, 본시 떠도는 소문을 믿지도 않을뿐더러, 쓸데없이 이 말 저 말 옮기는 것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며, 그런 짓은 앉아서 오줌누는 계집이라면 모를까 불알 달린 사내로서 차마 할 짓이 못 된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못 들은 걸로 하고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당사자를 위하는 것이냐, 아니면 들은 대로 정직하게 알려주는 게 올바른 것이냐 하는 문제로 오랫동안 고민하다, 그래도 혹시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소문이 사실일까 염려되어, 만일 그렇다면 혼자만 모르고 있는 文이 사람들로부터 웃음거리나 되지 않을까 걱정되어, 다시금 얘기하지만 자신은 그저 오로지 文을 생각하는 마음에 털어놓기는 털어놓되, 소문이란 건 어디까지나 믿을 게 못되는데다 나중에 알고 보면 결국 뜬소문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아, 그럴땐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게 상책이니, 구태여 진실을 캐고자 하면 못 캘 것도 없지만, 꼭 그렇게 해서 사달을 일으켜야만 속이 풀리는 건 아니더라도, 이왕지사 말이 나온 김에 한번 확인을 하는게 어떨까 싶기도 한데, 한편 생각하면 그저 술 한잔 먹고 잊어버리는 게 현명한 처신이 아닐까 싶기도 한 게 아닌 게 아니냐며, 병을 주는 동시에 약을 주는 요사스런 화법으로 그 수상한 소문을 전했을 때, 文은 그 자리에서 소문을 전한 인부를 당장에 해고해버리고 말았다. 그는 말을 전한 인부 앞에서 욕을 하며 세 번 침을 뱉은 후 흐르는 계곡 물에 귀를 씻었다.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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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7 22:19 2010/03/07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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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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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2008년 한여름부터 2009년 초여름까지 교보문고 작가 블로그(북로그)에 연재한 정이현 소설 "너는 모른다"가 드디어 이번주에 출간되었다. "달콤한 나의 도시"로 국내 '칙 릿'의 선두 주자로 꼽히게 된 정이현은 그 이후 단편집 "오늘의 거짓말"로 '칙 릿 작가' 이상의 역량을 보여줬고, 이번 소설로 아예 그쪽과는 '노선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연재를 완료한 이 소설을 며칠 전에야 모니터를 통해 읽었다. 꼬박 하루가 걸렸다. 연재 당시 이 소설이 매일 업데이트 되기를 기다린 사람들은 얼마나 감질났을까.

이 소설은 미스터리 연재물로, 저마다 사연을 가진 비밀 많은 가족들이 막내 딸 '유지'의 실종으로 인해 하나 둘 씩 그 베일을 벗어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방배동 서래마을 빌라에 살며 외제차를 몰고 다니는 부부, 학교 앞 원룸에서 자취를 하는 대학생 딸, 의대에 다니는 아들, 바이올린 영재인 초등학생 막내 딸 등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자면 완벽한 가족이건만...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짐작 가능한 설정이지만, 그녀의 글 속에 나오는 긴박함과 진지함은 또 다른 재미를 안겨준다. 인터넷에서는 묘한 여운을 남기고 끝나는데, 실제 출간된 소설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게 전부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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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0 20:39 2009/12/10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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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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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예담)

이 소설은 인터넷 서점 YES24에 연재 후 출간된 '인터넷 소설'이다. 박민규 소설이라면 무조건 읽고 보는 내가, 몇 번이나 차분하게 읽어보려고 시도했지만 모니터에서는 왠지 읽히지 않아 책이 나오기만을 기다린 소설! 종이책을 손에 들고 읽다보니, 그게 단지 '모니터'로 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바로 '작가 박민규'에게 기대하는 '유우머'가 없기 때문이었다! '박민규 치고는' 너무 진지하고, 템포가 느린, 그런 소설. 표지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고, 제목은 작곡가 모리스 라벨의 작품("Pavane pour une Infante defunte")과 같은, 화제가 될 만한 요소가 많은 소설이고, 거기에는 주인공이 '믿기지 않을 만큼 못생긴 여자'라는 사실까지 가세를 한다. 소설을 다 읽을 때 즈음에는 감동을 느낄 수 있고, 다 읽은 후 여운까지 있는, '웃기지 않은' 소설이다. 그의 다음 작품, 역시 기대가 된다.

책 속 구절 :
모처럼의 휴일은
갑자기 우리가 젊다는 사실과, 이 세상이 지하주차장처럼 칙칙한 곳이 아니란 사실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었다. 그렇군, 면도를 하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실은 젊었던 얼굴이, 마치 발굴된 화석처럼 거울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요한은 말했었다. 세계라는 건 말이야, 결국 개인의 경험치야. 평생을 지하에서 근무한 인간에겐 지하가 곧 세계의 전부가 되는 거지. 그러니까 산다는 게 이런 거라는 둥, 다들 이렇게 살잖아... 그 따위 소릴 해선 안 되는 거라구. 너의 세계는 고작 너라는 인간의 경험일 뿐이다. 아무도 너처럼 살지 않고, 누구도 똑같이 살 순 없어. 그딴 소릴 지껄이는 순간부터 인생은 맛이 가는 거라구. 이하동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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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3 17:50 2009/08/23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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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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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일주일 내내 아침 출근길 버스를 기다리며, 출근해서 구내 식당에서 혼자 아침밥을 먹으며 이 책을 읽었다. 밥을 먹다가 울컥하거나 가슴이 탁 막히기를 여러번 반복하며 다 읽었고, 새삼 작가 신경숙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져 찾아보고 싶어졌다. 15년도 넘었겠지만, "풍경이 있던 자리"를 읽은 후 신경숙의 작품은 왠지 손이 가지 않았고, 그 동안 단 한 권도 읽지 못했다. 그 사실을 아는 친구가 "외딴방'을 선물했고, 10년 전에 출간된 이 책을 이제사 읽은 것이다. 며칠 전에는 프랑스에서 비평가와 기자들이 제정한 '주목받지 못한 작품상'(Prix de l'Inapercu)을 수상했다는 이 유명한 책.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며 공단에서 일한 작가 개인의 과거를 그대로 적어 내려간 자서전적 소설이다. 당시 시대상을 생각한다면 개인의 삶을 넘어 선 시대적 메시지가 포함 된 글이기도 하고. 그럴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숙연한 마음을 갖게 만드는 소설이다. 

책 속 구절 :
지금도 나는 자연 앞에 서면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평화로워진다는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내게 있어 자연이란 얼마간은 피로하고 얼마간은 무서운 것이다. 나는 자연을 내 피부 바로 밑에서 배웠다. 감자를 캐려고 땅을 파면 지렁이가 나왔고 밤나무에 기어올라가려다 보면 쐐기가 쏘았다. 잡목은 팔을 찔렀고 계곡물 골짜기는 내 발바닥을 미끄러뜨렸다. 동굴이나 묘지 위 같은 데는 마음에 들었으나 동굴 속에 들어가면 박쥐가 험악하게 날개를 폈고 묘지 위에 오래 누워 있으면 햇볕에 그을려 얼굴이 쓰라렸다. 그래도 내겐 길거리나 집보다는 자연 속에 놓여 있을 때가 좋았다. 집보다는 자연 속에 놓여 있을 때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p.56)

내가 작가라는 걸 알게 된 식당 아줌마는 내게 딱 두 가지만 묻겠다고 했다. 딱 두 가지만, 이라는 말에 내 가슴이 철렁했다. 무슨 말이길래 딱 두 가지만, 이라는 단서를 붙이는지.
"한 가지는요......"
식당 아줌마가 물어본 딱 두 가지 중의 한 가지는 내가 어느 수준의 글을 쓰느냐는 것이었다. 어느 수준이라니? 잘 납득이 안 가서 내가 무슨 말인지......? 하고 되묻자, 식당 아줌마는 고갤 갸웃하더니 다시 성심껏 말을 했다.
"그러니까요. 내가 책을 딱 한 번 선물받은 적이 있었어요. 친척이 선물을 해주었는데, 내가 산 책도 아니고 해서 어떻게든 다 읽어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읽을 수가 없었어요. 나는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더라구요. 그 책을 선물받은 지가 사 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다 못 읽었어요. 아무래도 유식한 사람들이 읽는 책은 따로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거기는 어떤 수준으로 쓰는가 싶어서요. 나 같은 사람도 읽을 수 있는 그런 글을 쓰는지, 아니면 수준 높은 글을 쓰는지, 그게 궁금해서요?" (p.75)

"어디서 굴러먹다 온 말뼈다귀야. 여기는 생산현장이야. 생산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은 내 관할이라고. 어디다 대고 이래라저래라 하는거야."
유채옥도 생산과장과 똑같은 어투로 외친다. 우리가 기계인가? 왜 우리를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가? 닷새 동안 계속 이어지는 잔업에 코피가 터져 집으로 돌아간 미스 최에게 사직서를 쓰라니 그게 말이 되는가. 유채옥은 계속 외친다.
"우리의 권익을 위해 노동법에 따라 결정한 노조다. 회사에서 아무리 방해를 해도 우리는 결성식을 갖겠다."
생산과장과 유채옥의 삿대질이 오가는 싸움에 미스 최가 운다. 생산과장 대신 총무과장이 달려와 유채옥에게 배은망덕한 년, 이라고 소리를 지른다. 유채옥은 총무과장을 쏘아본다.
"당신에게 나, 은혜입은 거 없어!" (p.77)

노조지부장, 그가 한 말들을 기억한다. 나는 여러분들이 야근하는 시간에 이 세상 어딘가에서는 방에 딸린 욕실에서 따뜻한 물을 받아 목욕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깨닫게 하고 싶었습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이 희생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들을 귀히 여겨 권리를 찾아가기를 바랐습니다. 노조지부장, 그는 우리들의 침묵이 안타깝다. 권리를 주장할 줄 모르는 우리들. 그보다는 잔업이나 특근이 없어져서 수당을 못 받게 될까 봐 그것이 걱정인 우리들. 우리는 스스로를 귀히 여길 줄을 모른다. 우리는 그의 말처럼 희생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들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p.255)

"우선 대충 내가 입시공부를 할 수 있는 책을 사왔다. 수학이니 영어는 아예 시작하지도 말고 암기과목 위주로 해라."
큰 오빠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준다.
"선택과목은 가정으로 해라. 가정책은 뭘 사야 할지를 몰라서 못 샀다. 학교 앞 서점에 가면 주간 입시생들이 가장 많이 보는 문제집을 사도록 해."
열아홉의 나, 그만 놀라서 수저를 내려놓고 큰 오빠를 빤히 쳐다본다. 입 속에 든 밥을 씹지도 않고 그냥 꿀꺽 삼킨다.
"늦었지만 열심히 하면 전문대학이라도 갈 수 있을 거다."
큰 오빠의 목소리가 물줄기 같다. 어디선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꽃이 갑자기 화르르 피어나는 것 같다.
"밥 먹자."
오빠가 밥상 위에 놓인 시금치나물에 젓가락을 갖다댄다. 그냥 우두커니 앉아 있는 나를 큰 오빠가 빤히 쳐다본다.
"왜 그러냐?"
열 아홉의 나,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오빠 앞으로 당겨앉는다.
"오빠!"
오빠가 밥을 떠먹다 말고 다가앉는 열아홉의 나를 쳐다본다.
"정말이야?"
"뭐가?"
"정말로 나, 공부해도 돼?"
"응."
"정말로?"
"응."
큰오빠가 수저를 내려놓으며 또 힙겹게 웃는다.  (p.357~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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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7 12:30 2009/06/07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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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 주이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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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이란 지음 | 글의꿈)


논란의 대상이 아니었다면 읽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소설인데, 어쨌거나 논란이 되니 궁금해서 읽었고, 결국은 어느 정도의 실망감을 안고 책을 덮었다. 춘천막국수처럼 툭툭 끊어지는 문장에 당황스러웠지만 그 정도는 '신인 작가'임을 감안할 때,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당황'을 넘어 '당혹'에 가까운 건, 자신의 문장에 대해 스스로 뱉어버린 과찬의 말씀 때문. 분명 빠르게, 재미있게 읽히고, 참신한 부분도 없지 않으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거기까지. 앞으로 더 잘 할 거라는 멘트로 마무리를 했다면 좋았을 법한, 그런 소설이다. 정말이지 그랬다면, 4배는 더 즐거운 여운이 남았을테고, 차기작이 기다려졌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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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0 21:13 2009/05/10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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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 조경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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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젊고 아름다운 전직 모델과 사랑에 빠져 떠나가버린 남자에 연연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 그녀는 쿠킹 클래스 강사이자 레스토랑 '노베'의 요리사인 정지원이다. 떠나간 건 그 남자의 마음인데, 그 마음이 옮겨진 젊고 아름다운 모델에게 복수를 감행하는, 예측가능한 '의외의' 결말. 주인공은 요리사지만, 작가의 전직을 의심하자면 '요리사'보다는 '푸드 코디네이터'에 가깝고, "다 읽고 나면 입에 군침이 돌게 하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은 오히려 '맛있는' 요리보다 눈을 현혹시키는 '멋있는' 요리의 여운만 남긴다. 거식증인 여자와 비만인 여자, 여자 때문에 상처받은 남자, 남자 때문에 상처받다 못해 정신이 돌아버린 여자가 등장하는 이 소설은, 작가의 노련함이 돋보이지만 시종일관 펼쳐지는 그 '연연함'때문에 주인공이 너무 매력적이지 않은 게 흠.

책 속 구절 :
가장 관능적인 냄새는 어린 까마귀에게 사십 일 동안 삶은 계란만 먹여서 죽인 후 그것을 도금양잎과 아몬드오일에 넣어 뽑은 정수의 냄새다. 모든 여자들이 갖고 싶어하며 남자들이 원하는 냄새. 사향은 이제 흔해빠지긴 했지만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황홀하게 느끼는 냄새다.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여성이 껍질을 벗긴 사과를 겨드랑이에 끼워두었다가 땀에 흠뻑 젖으면 그걸 애인에게 줘 냄새를 맡게 했다. 냄새는 가장 오래 남는 기억이다. 사람들은 여기 잠시 머물다 가지만 냄새는 시간을 초월하는 법이다. 겨드랑이에 끼워두어 땀에 흠뻑 젖은 사과 냄새, 계란만 먹여 죽인 까마귀 냄새. 그 극치의 페로몬 향기처럼 나는 내 요리로 이 사람들의 미각을 지뢰처럼 폭발시키고 싶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비틀거리고 싶지 않다. (p.199)

미식가들의 음식에 대한 집착은 집요한 데가 있다. "거짓 배반"을 쓴 18세기 작가 니콜라 토마 바르트는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먹는 버릇이 있었다. 시력이 좋지 않았던 그는 음식들을 다 보지 못하고 결국 다 먹지 못하게 될까봐 늘 두려워하며 내가 이것을 먹었느냐? 저것은 먹었느냐? 하며 끊임없이 아랫사람들을 다그치곤 했다. 그는 결국 소화불량으로 죽고 말았다. 소고기요리를 좋아했던 다리우스 대왕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휘장을 쳐놓곤 소 한 마리를 통째로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커피에 중독된 작가 발자크는 하루에 커피를 사오십 잔씩 마시다 위염으로 죽었다. [...]
음식에 대한 집착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는 '오터런'이란 금지된 새요리에 중독된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의 일화다. 암으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안 미테랑 대통령은 1995년 12월 31일 새해 전야 만찬을 위해 친구들을 초대했다. 이날 메인요리는 명금(鳴禽)으로 멸종 위기에 처해 식용으로는 금지된 '오터런' 요리였다. 순결과 예수의 사랑을 상징하는 이 새요리는 미식가들이 손꼽는 세계 최고의 요리로, 오븐에 구워 통째로 입속에 집어넣고 먹는다. 이 새요리를 먹는 방법도 따로 있다. 아주 뜨거울 때 혀 위에 올려놓고는 새의 지방이 목구멍을 타고 줄줄줄 떨어지는 쾌감을 즐기다가 식기 시작하면 새의 머리부터 뼈째 씹어먹기 시작하는데, 이 때 오터런 특유의 뼈가 씹히는 오도독오도독 소리가 리듬을 타듯 고막을 울린다는 것이다. 그날 밤 미테랑 대통령은 한 사람이 한 마리씩만 먹게 되어 있는 전통을 어기고 두 마리를 먹었다. 그 다음날부터 음식을 넘기지 못하다가 세상을 떠났으니 오터런요리가 그가 이 세상에서 맛본 최후의만찬이 되고 만 셈이다. (p.238~240)

7월 첫째 주 월요일에 드디어 육류를 이용한 새로운 레시피 한 장을 완성했다. 사람고기와 맛이 가장 비슷한 건 돼지고기라고 한다. 남태평양에 사는 식인종들은 그래서 사람을 '키 큰 돼지'라고 불렀다. 돼지는 머리부터 꼬리까지 모든 부위가 맛이 좋다고 하지만 정작 혓바닥은 중세 말기에 돼지 검사를 담당했던 검사관들만 먹었다. 내가 사용한 건 소 혓바닥이다. 붉은 혀를 싸고 있는 흰 막과 힘줄, 목구멍에서 딸려온 근육을 제거하기 위해서 고기 다룰 때 쓰는 작고 날카로운 칼을 눈썹을 그릴 때처럼 짧게 짧게 끊어 정교하게 움직여가며 가운데 붉은 부분만 도려내었다. 칼은 쓰면 쓸수록 내 손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낀다. 칼을 쥔 손이 칼이 되는 느낌, 손안으로 칼이 사라지는 느낌, 칼과 하나가 되는 느낌, 입속의 혀처럼 칼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느낌은 역시 고깃덩이를 손에 쥐고 있을 때 가장 구체적으로 느껴졌다. 그건 밀가루 반죽을 쥐고 있을 때나 찢어지기 쉬운 야채를 만지고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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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0 21:10 2009/05/10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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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뽕과 소주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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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뽕과 소주의 힘 (김종광 지음 | 이가서)

"김종광 소설? 최신작으로 읽어"라는 충고를 무시하고 2003년에 출간된 작품을, 순전히 제목만 믿고 골랐다. 김종광의 글은 선배인 이문구나 성석제에 글을 떠올리게 하는 모양인데, 이 작품만 봐서는 그 떠올림에 '맥이 빠졌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다. 재기발랄하나 내공이 부족한, 그렇다고 참신한 쪽이 아니고, 능글맞은 쪽에 가까운, 그런 소설 모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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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2 10:16 2009/04/12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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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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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창작과비평사)

소설 줄거리에 대한 어떠한 사전 정보도 듣지 못한 채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바지의 단독주택'에서 일곱번째 딸아이로 태어나 숲 속에 버림을 받았다가 하루 만에 발견된 탓에 '바리'라는 이름을 갖게 된 주인공. 책 표지에 고운 얼굴로 서 있는 촌스러운 그녀가 동시대 인물이라니! 청진에서 태어나 화목하게 살던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국경근처에서 도강을 할 때까지만 해도, 백두산 자락에서 겨울을 맞이할 때까지만 해도 딴 나라 얘기였다. 영국으로 밀항하는 동안 주먹밥 한 덩이에 물 한컵으로 하루를 때우면서 주위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일이 버젓이 일어나는 장면은 또 어떤가. 하지만 바리는 나처럼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테러 소식도 듣고, 축포 속에서 21세기도 맞이한다.

일곱번 째 공주로 태어난 바리 공주와 이름은 같지만, 버림을 받은 후 부모를 위해 온갖 고행을 겪는 부분은 좀 다르다. 이 책의 주인공인 바리는 결국 소설이 끝날때까지 부모를 만나지 못하니까. 다른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소설을 읽는 내내 한 눈 팔기가 힘들었다. 보아하니, 초등학생이나 중, 고등학생에게도 많이 읽히는 모양. 추천할 만 하다.
 
책 속 구절 :
나는 여권을 얻게 되면 정식으로 결혼신고를 할 수 있고 노동허가증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비용 따위는 얼마가 되든 간에 큰 문제가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여권 대금은 아무리 못 주어도 오천 파운드는 있어야 할 테지만 알리와 내가 어떻게든 돈을 벌어서 갚아나가면 될 것이다.
할머니의 이야기 중에 장승이와 바리공주의 약속이 생각났다. 길값, 나무값, 물값으로 석삼년 아홉 해를 아들 낳아주고 살림 살아주어야 하는 세월.
나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시간을 기다리고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늘 기대보다는 못 미치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한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 (p.223)

자기를 보고 있다고 느꼈는지 그녀가 나를 한번 돌아보았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고 그애의 표정이 하도 어두워 보여서 나는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어느 한적한 길에서 그녀가 내렸을 때 나는 차창 밖을 계속해서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길에 내려서서 나를 한번 더 쳐다보았다. 나는 그 순간에 샹 언니를 생각했던 것 같다. 아아, 사람의 인연은 하늘에서 미리 짜놓은 줄에 서로 연결되고 엮이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미리 짜여진 모양이 정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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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8 18:55 2009/04/08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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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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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젊은 작가의 산뜻한 소설. 때때로 갑작스럽게 모자가 되어버리는 아버지 이야기("모자")를 두고, 독자와 평론가들이 '소설의 환상성' 운운하는 걸 "전 환상성을 내세운 적이 한 번도 없어요"라며 시니컬하게 받아치는 작가의 답변이 신선하다. 소설들은 대체로 엉뚱하고, 당황스럽지만 읽다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되는 자연스러움이 있다. 표제작인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와 "오뚝이와 지빠귀"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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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8 11:17 2009/02/08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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